자랑스런 세관원의 표상 독립운동가 연병환
작성자 : 김재석 조회수 : 4004
등록일 :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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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해관원 연병환의 생애와 독립운동

- 형제 · 사위 · 외손녀 3대에 이어진 독립운동 가족 -

 

연병환(1878.10.21.~1926.8.19.)19087월 이후 중국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해관(海關)에서 관리로 근무하면서 1919년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3·13 만세시위 운동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일제 간도총영사관(間島總領事館) 경찰에 체포(逮捕)되어 2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이후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1920년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연규은 옹과의 뜻밖의 만남


연병환(延秉煥1878~1926) 선생에게 끌린 것은 그가 대한제국 해관원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이었다. 중국 망명 이후 해관원 신분으로 가계에 3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시킨 점도 호기심을 끌었다. 그의 자취를 따라 2022.7.15. 생가가 있는 충북 증평을 찾았다. 생가 옆에 조성된 항일 역사공원에는 그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공원 관리책임자 신치영 주무관에게 내 세관 근무 경력과 이곳을 찾게 된 경위를 말하니 연병환의 종손이 증평 읍내에 살고 있으니 만나 보면 도움이 될 거라 알려줬다. 연규은 옹과의 뜻밖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연병환의 종손 연규은(연병환의 동생 연병호의 손자) 옹은 만주에서 태어나 장춘시 조선족 중학교에서 근무하다 오래전 가족과 함께 한국에 정착하여 증평 읍내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2014년 큰할아버지 연병환의 유해를 찾기 위해 중국 당국 요로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연규은 옹과 짧은 만남이었지만 애국지사 연병환의 생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헤어질 때 노옹은 내게 애국지사 연병환 · 연병호 · 연미당 화보집한권을 건네주었다.


연병환, 대한제국 해관원이 되다.


연병환은 18781021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연채우의 네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나 연병호, 연병주, 연병오 세 동생이 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을 전후 관립 외국어학교를 다녔고 졸업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99617일 대한제국 해관원에 임명되었다.

 

승정원일기(1901.12.2.)와 황성신문 관보(1901.12.7.)에 측량 업무를 담당하는 탁지부 양지아문 위원 임명 기록이 있는데 이후 해관으로 복귀한 듯하다.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1022(갑인, 양력 122) 맑음 양지아문 양무위원에 이헌우 등을 임명하였다

 

이인후(李寅厚), 정호익(鄭鎬益), 남용진(南龍鎭), 김두현(金斗鉉), 변원형(卞源衡), 박종응(朴鍾應), 김정현(金定鉉), 윤지하(尹志夏), 이승두(李承斗), 연병환(延秉煥), 이응우(李應宇), 이현구(李鉉九), 최호만(崔浩萬),

 

1904~1905년에는 주일공사로 부임하는 조민희를 수행해 도쿄로 가서 외교 업무를 돕기도 했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7년 부산세관(일제 통감부 시기 해관이 세관으로 명칭 변경) 관방통계계 소속으로 주로 무역 통계정보를 다루는 업무를 맡았다. 곡산연씨 족보 기록에는 연병환은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에 분개하여 세관 방판직을 사퇴했다.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가 19088월 청주 군수 자리를 서임하자 이를 거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망명 후 중국 해관원으로


대한제국이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고 행정권과 재정권이 일본에 빼앗기고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조선인 세관원들은 잇따라 사직하고 조국을 떠나 청나라 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권 상실기 1908년경 중국으로 망명을 택한 대한제국 세관원이 연병환을 비롯한 정대호, 이학인, 서병규가 그들이다.

 

* 정대호(1884~1940)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에 연루돼 체포돼 일본 하얼빈총영사관으 로 호송 된후 뤼순 감옥 수감. 거사 직전 안의사 부탁으로 국내 잠입 가족을 피신 시켰으 며 안중근의사 와는 진남포세관 근무시 부터 의형제를 맺고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쑨원 의 후원으로 싱가포르에 정착 사업을 하며 독립운동 후원

 

* 이학인 (1867~1917) : 영친왕 이은 통역사로도 활약,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 노(본명 노명자)의 외조부

 

* 서병규 1872~1952 미국 유학시기 촬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망명후 상해해관을 퇴직 해방 이후 가족과 함께 귀국 6.25 전쟁중인 1952년 서울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


연병환은 19089월 조선해관에서같이 근무했던 영국 해관원 친구의 추천으로 청나라 안동 해관(현재 단동해관)에 취직했다. 이후 1909년 중국 훈춘해관을 거쳐 191910월 상하이 해관으로 전임될 때까지 약 10년간 용정해관에서 근무했다.

 

 일제 정보기록 간도에 있어서 중국 관공서에 취직한 선인명부 송부의 ”(1916.12.4.)에 따르면, 연병환은 다른 조선인보다 빠른 시기인 19087월에 용정 해관에 취직했다. 안병환의 만주 중국해관 근무 시기에 대해서는 곡산연씨 족보와 일제 정보기록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일치한다당시 중국관청 근무 조선인들의 봉급을 조사한 일제의 비밀기록에 의하면 연병환은 월 150엔을 받았는데 이는 동료 해관원보다 10배나 많은 고액이었다. 연병환이 중국해관에서 고액의 급료를 받으며 요지의 중국 해관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어학 실력과 해관업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이었다. 연병환은 이 돈으로 북간도 지역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연병환에 대한 독립운동가의 회고


연병환에 대한 독립운동 관련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2008년 대통령 표창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1919년간도 용정 3·13 만세시위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 처벌받은 사실과 1920년대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의 단원 활동이 전부다. 하지만 용정해관 근무 당시 연병환의 독립운동 활동은 그의 집을 방문했던 대종교의 유력 인물인 독립운동가 정원택과 박영준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원택은 19111214일 연병환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을 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용정촌에 이르러 박남파(대종교 시포사로 만주에서 활동한 박찬익의 호, 임정 법무부장 역임, 박영준의 부친)의 소개로 연병환 씨를 방문하니 연 씨는 충청북도 사람으로 어렸을 때 영국으로 유학하여 영어에 숙달하니, 해관에 취직하여 재산이 풍부하더라. (후략) 또한 연병환은 자신이 북경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30원의 여비를 주며 전별했다고 한다.”

 

* 박찬익(朴贊翊) 이명은 박정일(?精一박창익(朴昌益박순(?). 호는 남파(南坡).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 박영준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 용정 연병환의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해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내가 5, 6세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아버지(박찬익)는 주로 용정에 나가서 독립지사들을 만나 간도의 교포들 문제, 교육문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문제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논의하는 장소가 연병호 씨 형인 연 선생(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댁이었다. 영국세관에 다니고 있던 선생(연병환)은 직접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 뒷바라지라도 해야만 한다는 마음으로 월급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냈고,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는 등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대종교 중광단과 연병환의 활동


중광단(重光團)1911년 나철, 서일 등 민족종교 대종교도 들이 조국이 일본에 병탄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설립한 단체다. 만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항일 무장단체로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이 속한 북로군정서의 전신이다. 길림성 왕칭현에 본부를 둔 이 단체는 정보 연락기관인 경신분국을 두었으며 초기에는 무장투쟁보다는 청년들에 대한 교리 및 애국 교육에 힘쓰며 교인과 단원 확보에 주력했다. 191887일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김좌진을 받아들여 장교 양성 기관인 사관연성소를 세우고 병력 500, 소총 500, 권총 40, 기관총 3, 탄환 100만 발에 군자금 10만 원을 보유하는 항일 무장단체로 급성장했다.

 

* 나철(1863~1916) :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 일하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구국 운동을 벌였다. 한일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교주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다 자결했다.

 

앞에서 언급한 독립운동가 정원택과 박영준은 대종교 주요 핵심 인사이자 중광단에서도 활약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국권 상실기 단군 신앙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대종교를 신봉했다. 이후 만주로 망명 대종교 총재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해 중국에 건너온 동포들을 도우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이다. 연병환이 대종교가 설립한 중광단 핵심 인사들인 박찬익이나 정원택과 가깝게 교류하며 지낸 사실은 많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연병환은 중국 해관 근무 때 얻은 정보를 만주 독립 무장단체인 북로군정서의 전신인 중광단에 제공하고 군사공작에도 비밀리에 가담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연병환이 대종교에 가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독립군 북로군정서와 체코군단


청산리전투는 만주 독립군 부대가 일제에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협력하여 이룬 성과로 북로군정서는 중광단의 후신이다. 중광단의 비약적 무장력 확보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Czechoslovak Legion,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군단, 이하 체코군단)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와중에 탄생한 10만 병력 규모의 부대다. 당시 해삼위로 불리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던 체코군단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과의 무기 거래는 1920년대를 전 후한 무장 한인 독립운동과 당시 동북아 정세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한 요소다.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철도 귀환 대장정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철도를 통한 이동은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Ana basis, 1만 인의 퇴각)에 비교되는 역사적 사건의 한 특이한 형태로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강제로 징집되어 같은 슬라브계 민족인 러시아와 싸워야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의 전투에 투입된 체코 병사 중 일부는 투항하거나 귀순해 러시아 측에 참전해 싸웠다.


당시 러시아에 속한 우크라이나에는 많은 체코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자진해서 군대를 조직해 러시아 편에 서서 독일, 오스트리아 추축국과 싸우며 그 대가로 조국 체코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 우크라이나 체코인 부대와 투항 체코인 부대가 합쳐진 만들어진 군대가 바로 체코군단이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부가 적국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측은 체코군단을 서유럽으로 이동시켜 독일과의 전쟁에 활용하려 했기 때문에 이들의 귀환을 적극 지원했다.

 

* 체코군단 병사들은 시베리아 철도로 우랄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6,000km 기차 대장정 후 배편으로 귀환했다.


체코군단이 귀환하기 위해서는 동유럽 영토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적국 독일 점령지역으로 갈 수 없게 되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배편으로 귀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체코군단은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다. 연합국은 191710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확립되는 것을 막으려 소련 국내의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병했다. 이 사건이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열강이 일으킨 대소간섭전쟁이다. 체코군단은 우랄산맥을 넘어 볼셰비키 적군과 싸우면서 동쪽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이때 일본은 연합국 중 가장 많은 7만 병력을 시베리아 바이칼지역까지 출병시켜 반혁명 세력 백군을 지원하며 체코군단의 귀환을 도왔다.


체코군단의 독립군 무기 공여의 성격


만주의 독립군 북로군정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군단의 이런 사정을 파악한 뒤 비밀 접촉에 나섰다. 일설에는 19207월 체코군단 수뇌부가 같은 처지의 탄압받는 피지배 약소민족이란 동병상련에 일본의 눈을 피해 북로군정서에 무기를 넘기겠다고 통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체코군단의 무기 공여는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는 의도보다는 금전적 욕구와 귀환에 짐이 되는 무기의 단순한 처분 과정이었다. 당시 체코군단의 무기를 산 사람들은 독립군 외에도 중국인과 러시아인 등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 판매 행위도 군단의 공식적인 승인하에서가 아닌 소수 군단 병사들의 일탈한 행위였다. 어쨌든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떠날 때 중광단의 후신 조직인 북로군정서는 소총 1200, 기관총 6, 박격포 2, 탄약 80만 발,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헐값으로 대량 확보할 수 있었다.

 

체코군단으로부터 공급받은 무기는 3개월 뒤인 그해 10월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좌진·이범석·나중소가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1021일부터 26일까지 치른 청산리 대첩은 현지 동포들의 지원과 독립군들의 활약에 기인하지만,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최신 무기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야로슬라프 올샤 주한 전 체코대사는 "체코 병사들이 사용한 총이 한국 독립군에 무료로, 또는 매우 저렴하게 매각된 수많은 사례가 밝혀졌다."라면서 "한국 독립군은 이 무기들로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충분한 전력을 얻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체코군단의 독립군에 대한 무기 공여의 성격에 대한 여러 주장도 있지만, 이 일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인들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체코인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이루어 낸 역사적 사건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체코군단과 독립군의 만남은 체코와 한국 독립운동사에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병환의 영국세관 근무설 진상

 

앞에서 용정의 안병환 집을 방문한 대종교 계열의 두 독립운동가 정원택은 연병환이 영국에 유학했으며 박영준은 영국세관을 다니고 있다고 자서전 등에 기술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연병환의 영국 유학이나 영국세관 근무설은 관립외국어 학교 진학 사실이 와전되었거나 착오라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가 20세 전후 관립외국어 학교에 다녔고 이후 10여 년간 대한제국의 관직에 근무하고 있어 시간상 이는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연병환의 영국세관 근무설이다. 독립운동가 박영준이 용정해관에 근무하는 연병환이 영국세관에 다닌다고 말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아 의문이 든다. 하지만 당시 영국인들이 장악하여 운영하던 중국 해관의 역사와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런 의문에 일말의 실마리가 보인다.

 

연병환의 영국세관 근무설이 나오게 된 배경


청나라 해관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인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가 모국을 등에 업고 40여 년간 장악했던 조직이다. 중앙의 외국인 총세무사는 중국 전지역 해관의 세무사 임명을 좌지우지했다. 명목상 중국인 감독이 해관의 총책임자였으나 실권은 서양 외국인 세무사에게 있었다. 이런 외국인 세무사제도는 애로우호 사건으로 벌어진 2차 아편전쟁으로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 이후 시작되었는데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반식민지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00년 무렵 청나라 해관은 영국인 해관원 수가 500명 정도로 영국인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에 의해서 장악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중국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때의 담보(擔保)가 주로 해관세(海關稅)였고 차관 상환 사항도 해관의 주요 업무였기 때문에 해관의 최고 책임자인 당시 총세무사 하트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트는 청불전쟁 후의 외교 현안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청의 실력자 이홍장과도 경쟁 관계였을 정도로 서태후 등 청 조정에서 신임받는 막강한 실력자였다. 외국인 세무사제도 시행 이후 중국 해관의 최고 책임자인 총세무사직은 1949년 신중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약 90년 동안 외국인, 특히 영국인이 독차지해 왔다. 이 시기 해관 간부직은 거의 외국인들이 차지하여 중국인 해관장은 단 한명도 배출 하지 못했다.


당시 이러한 영국의 청나라 해관 장악 운영 상황을 지켜본 정원택과 박영준 같은 많은 조선인독립운동가에게는 청나라 해관이 영국에 접수당하여 마치 영국세관처럼 비쳤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연병환이 영국 해관에 다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런 추론을 해보는 것은 박영준이 자서전에서 당시 영국세관에 다니고 있던 선생(연병환).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는 등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영국세관을 잉글랜드라는 지리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강력한 근거다. 왜냐하면, 박영준이 지리적 개념으로 연병환이 영국세관(잉글랜드 섬)에 근무한다고 인식했다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영국 본토에서 근무하면서 만주 용정에 있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에게 모임 장소로 제공하며 연병환도 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해관은 특히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의 용정 해관도 청나라 총세무사청을 통해 영국이 장악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연병환이 자연스럽게 영국해관에 다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절 뉴욕세관을 미국세관이라고 하지 않고 영국세관이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연병환의 영국세관 근무설이 나오게 된 배경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해관과 청해관과의 역사적 특수 관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해관과 청해관의 특수관계


조선해관은 1883년 청나라 해관을 모델로 창설된 이후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세력이 조선에서 축출되기 이전까지는 청의 총세무사 영국인 로버트 하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선해관은 하트에 의해 발령받은 청나라 외국인 해관원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선해관 무역 통계를 상하이 해관 조책처에서 발행하는 청나라 해관 통계에 포함시켜 마치 청나라 해관의 일부처럼 보였다. 조선해관의 이러한 기이한 운영 형태는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종전의 전통적 조공체제를 실질적 식민지배 체제로의 변환 시도의 일환이었으며 청나라 해관을 지배하고 있던 당시 총세무사 하트의 조선해관까지 장악 하고자 하는 개인적 의도도 있었다. 연병환이 만주로 건너간 후 청나라 안동 해관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청나라 해관과 조선해관과의 특수관계 하에서 같이 근무했던 영국인 해관원의 주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병환은 이때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청나라 해관에서 조선해관으로 파견되어 같이 근무하던 외국인 해관원들과 친분을 쌓았을 것이다.


연병환이 조선해관에 근무하던 1908년도 당시만 해도 조선해관에는 청나라 해관에서 파견되어 근무하던 외국인 해관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때 조선해관에서 사귀었던 많은 외국인 해관원들은 중국으로 복귀해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도 각 지역 중국해관에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연병환이 조국을 떠난 후에도 중국 주요 해관에 취직해서 오랫동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들 외국인 해관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해관원 연병환에 대한 일제의 탄압


연병환은 용정해관에 근무하고 있던 1910년 연길에 여자중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사업에도 앞장섰다. 또한,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용정에서 일어난 3.13 만세 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 1919620일 자 오사카 매일신보는 일본 경찰이 유명한 배일선인 연병환의 집을 수색했더니 커다란 아편 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갑자기 그가 천진해관으로 전근 명령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는 일제가 1919년 용정 3.13 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연병환이 물증이 없자 그를 체포하기 위해 아편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이때 중국 해관은 연병환을 보호하려고 천진해관으로 급히 전출 발령을 냈지만, 연병환이 송별연에 참석하느라 2~3일 지체하는 바람에 1919.6.19. 일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용정 일본 영사관 감옥에 2개월간 갇혀 고초를 겪고 풀려났다. 이후 이 사건으로 상하이 해관으로 전임되었는데 그 시기는 191910월경으로 추정된다. 상하이에 3.1 운동 직후인 1919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수많은 조선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영사 경찰과 밀정을 동원하여 음모를 꾸미며 엄중히 감시하고 탄압했다. 연병환이 상하이에 와서도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자 일제는 그를 상하이에서 쫓아낼 공작을 폈다.

 

192012월 말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 특별전권공사 오바타 토리키치(小幡酉吉)는 일본 내무대신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에게 보고 전문 한통을 보냈다. <배일 조선인 지나 세관원 연병환 전임에 관한 건 1, 1920.12.25.>으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간도해관으로부터 상해 해관에 전임한 귀화 조선인 안병환을 조선인 배일 운동의 중심인 상하이에서 내쫓을 공작을 1년여간 벌여 마침내 중국 총세무사 수석비서관(Chief Secreatary) 리챠드슨(Richardson,J. W.) 으로부터 산투아오(三都澳)로 전근시킨다는 통지를 받고 이에 사은을 표했다

 

산투아오는 복건성의 3대 항중 하나로 꼽히는 항구도시지만, 조선인들이 거주하지 않는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오지였다.

일제가 상하이 해관원 연병환을 벽지로 쫓아내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벌인 것은 간도 용정에 있을 때부터 그가 요시찰 대상이었고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와 자주 어울리는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연병환이 산투아오(三都澳) 해관으로 전근 조치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923년에 장수성 진강해관으로 다시 전임하였고, 19257월 중국 하남군의 고문을 맡았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 연병환의 청국 해관 임용은 19088월이라는 것과 임용 당시 직급은 4급 서기(供 事) B로 수습직원으로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직은 19266월로 그가 사망한 달이다. 최종 근무지는 진강(鎭江) 해관이었고 당시 직급은 1급 서기(1st Clerk, C) 로 휴가 중이었다. (관세청)


연병환 가족들의 대를 이은 독립운동

 

연병환은 제헌 의원을 지낸 동생 연병호 등 4형제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독립운동가로 길러냈다. 딸 연미당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거사 때 도시락 폭탄 보자기를 직접 만들었다고도 전해지는데 임시정부 시절부터 김구 선생과 밀접한 관계인 엄항섭과 결혼 했다. 임정 내무총장 이동녕의 주선으로 맺어진 대를 이은 부부 독립운동가의 탄생이었다. 엄항섭과 연미당 사이 태어난 외손녀 엄기선도 부모를 도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렇듯 연병환(대통령 표창 2008) 가계의 독립운동은 동생(제헌 의원 연병호, 독립장 1963), (연미당, 애국장 1990)과 사위(엄항섭, 독립장 1989) 외손녀(엄기선, 건국포장 1993)35명으로 이어졌다.

 

연병환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망명 후 중국 해관원 신분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뒤에서 지원했으며 가족들도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연병환 가계는 우당 이회영 6형제 일가가 만주에 집단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처럼 우리 독립운동사에 보기 문 사례라 하겠다. 형제와 딸. 사위. 외손녀 등 3대 독립운동가를 배출시킨 가문의 맏형이자 그림자 독립운동가였다.

 

88년 만의 애국지사 연병환의 국립묘지 안장


연병환은 1926819일 상하이에서 투병 중 48세를 일기로 사망해 영국인 묘지 정안사에 안장됐다. 안병환의 장례식과 5년 후 1931년 부인 김정숙 장례식에 김구,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주요 요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것을 보면 당시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서 연병환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연병환의 독립운동 공적이 많이 알려지면서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송하려 했는데 행방이 묘연했다. 중국의 문화혁명 혼란기 처음 안장되었던 영국인 묘역에서 그의 유해가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종손 연규은의 끈질긴 노력으로 상하이 쑹칭링 능원에 이장 되었던 유해를 다시 찿아내 우여곡절 끝에 그가 숨진 88년 만에 국내로 모셔오게 되었다. 연병환은 20141114일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5 묘역에 안장됐다.

 

연병환, 자랑스러운 세관원의 표상


충북 증평에는 연병환의 동생 연병호의 이름을 딴 항일역사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연병환이 그를 만주로 불러들여 형의 영향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 했다. 광복 후에는 제헌 의원을 지내고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청렴한 처신으로 정계는 물론 지역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연병호 항일역사 공원에는 그의 동상과 기념관도 세워져 있는데 형 연병환은 공원 한쪽에 공적비만 덩그러니 서 있다. 연병환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도 동생보다 못지않을 텐데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연병환은 사후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2008년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연병환 선생은 대한민국 세관의 전신인 대한제국 해관원 출신 독립운동가로 우리 관세청 5000여 관우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관세사지 통권212호/2024 봄호 관세사 김재석)